특히 새라의 크리스마스는 애처롭다. 분명 사랑하는 가족과 보내긴 하지만 올해 만큼은 다른 성탄을 꿈꿨기 때문이다.
짝사랑 해왔던 동료 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얼마나 행복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이다. 새라에겐 그 해 성탄이야말로 응답을 받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라에겐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전화하며 집착하는 오빠가 있다.
영화 초반, 야근 중인 새라의 옆모습을 롱숏으로 찍은 씬에서 그녀와 오빠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Burden, 부담. 사무실에 사진을 둘 정도로 사랑하지만 부담스러운 가족. 새라와 칼의 첫 데이트를 잔인하게 망쳐버린 것도 오빠다. 그럼에도 새라는 오빠와 성탄을 보낸다. 가족이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을 맞이했고 마무리 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표현 중, “다사다난”이라는 말 보다 걸맞는 표현이 있을까. 저마다 각자의 의미로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겠지만, 모두 비슷하게 행복으로만 다사한 새해를 꿈꿀 것이다.
그래서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1월 어느날의 히드로 공항을 보여주며 끝난다. 새로운 시작인듯 하면서도 익숙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자취하던 시절 나는 일절 요리를 하지 않았다.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고 정신이 없어서 음식을 해 먹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점심, 저녁은 회사에서 먹고 퇴근길에 근처 마트에서 주전부리를 사다 먹곤 했다. 내가 살던 자취방의 부엌은 입주하던 날의 상태 그대로 퇴거까지 물기 하나 없는 뽀송한 채로 있었다.
하지만 육아휴직 6개월 차, 난 나물을 직접 무치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내가 신기한지 엄마는 본인 가게에서 파는 식재료를 우리 집으로 날라 주시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완성된 반찬 상태로 받아왔지만 요새는 그냥 아무 채소나 식재료를 냅다 가져다주신다.
제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의식이다. 제사의 주인공은 아무 말이 없는데도 남은 가족들이 망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떠난 이를 기리는 의식을 치른다. 그렇게 모인 가족들은 저마다 이 의식 대해 갖고 있는 의견들이 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떠나 보낸지 몇 년이 지나도 감정에 복받쳐 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이냐는 듯 냉소하기도 한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2008년 작품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장남의 기일에 모인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이런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이 집안의 어머니도시코와 딸 지나미의 대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채소를 손질하는 손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능숙하게 당근 껍질을 벗겨내는 어머니와 달리 딸의 손은 마지못해 하는 듯 느릿느릿 하기만 하다. 첫 장면 부터 어머니와 딸이 살짝 어긋나 있음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것이다. 둘은 같은 요리를 하며 무척 가까운 모녀 간의 대화를 하는 것 같지만, 살짝 들춰보면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나오는 이 가족의 대화나 상황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영화의 발단이 되는 기일의 주인공은 이 집안의 장남으로, 10년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날은 딸 지나미네가 올 뿐만 아니라 아들 료타네는 모처럼 하룻밤 자고 가기로 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료타는 본가에 내려가는 것을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첫 등장에서 부터 알 수 있다. 부모님께는 이미 자고 간다고 이야기 해버렸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빨리 본가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료타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을 뿐더러, 본인의 직장도 불안정한 상태라 부모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껄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집에서 겉도는 존재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료타는 태어날 때는 둘째였지만 형이 사고로 죽게되면서 첫째가 되어버렸다. 가족들 모두 그에게 '이젠 네가 장남'이라고 하지만, 그는 죽은 장남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님 앞에서 구태여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남의 역할을 맡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한테 장남 노릇을 시킬 거면 나랑 형을 헷갈리지나 말든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부모님이 어릴 적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형을 헷갈리자, 카메라에 비춰지는 료타의 표정에서 그의 기분을 읽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료타의 모습으로 짐작해보건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형과 비교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어느 순간엔 형을 따라잡는다거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멈췄던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진심으로 료타를 못마땅해 한다거나 싫어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은, 앞서 나오는 장면에서 아버지가 아츠시와 단 둘이 있을 때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아츠시를 대하는 아버지의 눈빛이나 어조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얄궂게도 몇 십년을 함께한 가족들 앞에서는 퉁명스러운 태도 때문에, 가족들이 아버지의 진심을 헤아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결국 료타가 자신이 원가정 내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고민하는 이유는 부모님의 태도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의 겉보기에 무뚝뚝한 태도 뿐 아니라, 따뜻한 것 같지만 이면엔 냉기가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그렇다. 영화 속에서 가족이란 존재의 차가운 이면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어머니를 그려내는 장면은 정말 절창이다. 가령, 늦은 저녁 조용한 시간에 어머니와 료타가 나누는 대화가 그렇다. 장남의 기일이라고 하루 종일 식구들과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한 어머니가 사실 어떤 마음으로 기일을 보냈던 건지 알게 되었을 때, 더더욱 헷갈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료타가 부모님의 의중에 대해 갈피를 못 잡는 반면, 딸 지나미는 비교적 부모님 의중을 파악하고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료타는 오랜만에 집에 왔기에 이제야 욕실 타일이 깨진 채로 방치되어 있거나 노인용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지나미는 자주 부모님 집을 드나들면서 일찌감치 부모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같이 살자고 하지만, 부모님은 지나미의 마음은 모른 채 아직까지도 죽은 장남의 물건들을 껴안고 지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넉살 좋은 사위의 노력도 장남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가 닿기엔 역부족인 듯 하다. 지나미는 료타와는 다른 양상으로 가족 내에서 자리를 못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료타의 처인 유카리 또한 이 집안에서 굉장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료타와 결혼하여 이 집에 시집온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자신과 아츠시를 다른 남 취급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점점 지쳐가는 중이다. 어머니가 고이 보관해둔 기모노를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마음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료타와의 아이는 갖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크게 상처를 받고 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 하고자 노력하지만, 유카리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고된 감정 노동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부모의 뒤를 따라 걸으며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몇몇 암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우연히 거실로 들어온 노란 나비에 홀려 죽은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유카리와 아츠시의 모습이나, 이웃집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가는데도 의사이면서도 아무것도 못하는 늙은 아버지를 목격하는 료타의 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자식들은 사실 저절로 부모를 닮고 싶어하고 곁을 원한다는 것을 아츠시를 통해서 그리고자 하는 것 같다. 아츠시는 일찍 친아버지를 여읜 조숙한 아이다. 아츠시 또한 이 집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인물로, 의붓 사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중이다.
아츠시는 료타가 어린시절 어떤 아이였을지 암시하는 캐릭터인데, 극 초반에 “아무도 안 듣는데” 왜 죽은 생명에게 편지를 부쳐야 하는지 되묻는 장면에서 기일을 챙기는 것에 회의적인 료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또 의붓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 밤하늘을 보며 혼자서 기도인지 다짐인지 모를 독백을 하는 모습에서 료타가 한때 아버지 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했던 심리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 장면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저릿한 이유는, 처음엔 죽은 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비웃었던 아이가 스스로 밤하늘에 대고 기도 같은 독백을 하는 모습을 통해 기일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에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것 같아 상처를 받으면서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어하고, 먼저 떠난 가족의 빈 자리를 보는 것이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기일을 챙기는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이런 면에서 료타를 비롯한 자식들이 집안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앞으로 아츠시가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계속 한발 늦을지라도.
“사랑의 기적(1991)”은 뇌염으로 인해 평생 뇌성마비를 앓아온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와 그가 입원해있는 요양병원 의사 닥터세이어(로빈 윌리엄스)가 주연 한 영화다.
영화는 수십년 간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레너드가 ‘엘도파’라는 신약 덕에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아빠도 원인 모를 뇌질환으로 레너드와 같이 몇 년간 마비상태로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빠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마비 증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난 아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만약 엘도파 같은 약이 있었다면, 영화에서 처럼 짧게나마라도 아빠가 그동안 그 몸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들을 수 있었을까. 아빠의 병문안을 가면, 아빠는 떼꾼한 눈으로 우릴 뚫어져라 보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어서 갑갑함과 외로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만나면 이야기 해드리고 싶다. 그 때 더 자주 만나러 못 와서 미안했다고.
영화 속 주인공인 닥터세이어는 ’올리버 색스‘라는 신경학 전문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저런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니.
호기심이 동해서 그가 쓴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최근, 그 중 하나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 있는데 알콜성 치매를 앓고 있던 지미의 사연에서 또 내가 사랑한 가족 한명이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시장에 나물을 팔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뇌의 일부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후 평생 극심한 두통과 신경통으로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타고난 영민함과 기민함은 잃지 않으셨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할머니도 결국 뇌의 일부가 없는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에서 들어왔나?”
내가 유학 후 귀국한지 한참 지나고도 몇번이나 엄마에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치매가 시작 된 것이다.
그 후 할머니의 치매 증세는 급격하게 심해졌다.
이전의 할머니는 대체로 꼿꼿한 모습이었는데, 증세가 발현 된 이후로는 자주 실없이 웃기도 하셨고 자주 통곡을 하기도 하셨다. 그동안은 그 모든 감정을 참아왔지만,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람 처럼.
한번은 젊어서 돌아가신 증조 할아버지 사진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며, 그 분이 어떻게 두 아들과 한날한시에 돌아가셨는지 한참을 이야기 하셨다. 아마도 곱씹으면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하지 않으셨던 이야기였던 것 같았다. 그 날 처음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집을 나가서 길을 헤메기도 하셨다. 삼촌은 고육지책으로 할머니의 손목에 가족의 전화번호를 문신으로 새겼는데, 할머니는 그 문신을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생업이 바빴던 우리 가족들은 긴 회의 끝에, 모두의 집과 가까운 시내 요양병원에 할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가족 모두 틈만 나면 병원을 방문했고, 나도 다니던 학교와도 가까워서 종종 하교길에 들러 할머니를 보고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 동네 일대에서 가장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 요양병원도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곳이라, 때마다 병원 스피커에서 삼종기도를 틀어주었다. 할머니는 그 때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길을 가다가도 삼종기도 때가 되면 잠깐 멈춰서 기도 하던 할머니였다. 그랬던 할머니를 병원에 두고 나오다가 뭔지 모를 서글픔에 복받쳐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 온 적도 많았다.
책에서 소개 된 지미도 성당에서 만큼은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거기서 또 할머니가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끊임없이 동의와 양해와 이해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속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는 너무나 어렵다.
이렇게 사는 나에겐 정말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애초에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출산에 대한 문제이다.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친구, 선배, 어른 때로는 종교인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누구도 태어날 아이로부터의 “동의” 없이 출산을 하는 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은 없는듯 하다. 이런 고민하는 나를 걱정이 과하다거나 혹은 특이한 사람 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난 오히려 어떻게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지 의아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런 것 까지 다 생각하다가 애 못낳으면 어쩌려고”라며 걱정하는 어른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명명할 수 없는 불편감으로만 느끼고 있던 생각을 “개념화“ 해 준 영화가 있다. 가버나움이다. 나를 낳고도 고통에 방치시킨 부모를 고소하겠다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버나움은 2019년에 개봉했는데, 그 해는 내가 결혼한 해이다.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다. 너무 고통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엔, 어쩌면 출산과 양육은 동의가 아니라 영원히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뭐가 되었든, 그게 동의이든 양해이든, 그것은 출산자의 책임임은 차이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