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Ancco 2023. 4. 20. 23:48


“사랑의 기적(1991)”은 뇌염으로 인해 평생 뇌성마비를 앓아온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와 그가 입원해있는 요양병원 의사 닥터세이어(로빈 윌리엄스)가 주연 한 영화다.

영화는 수십년 간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레너드가 ‘엘도파’라는 신약 덕에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아빠도 원인 모를 뇌질환으로 레너드와 같이 몇 년간 마비상태로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빠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마비 증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난 아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만약 엘도파 같은 약이 있었다면, 영화에서 처럼 짧게나마라도 아빠가 그동안 그 몸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들을 수 있었을까.
아빠의 병문안을 가면, 아빠는 떼꾼한 눈으로 우릴 뚫어져라 보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어서 갑갑함과 외로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만나면 이야기 해드리고 싶다. 그 때 더 자주 만나러 못 와서 미안했다고.



영화 속 주인공인 닥터세이어는 ’올리버 색스‘라는 신경학 전문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저런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니.

호기심이 동해서 그가 쓴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최근, 그 중 하나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 있는데 알콜성 치매를 앓고 있던 지미의 사연에서 또 내가 사랑한 가족 한명이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시장에 나물을 팔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뇌의 일부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후 평생 극심한 두통과 신경통으로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타고난 영민함과 기민함은 잃지 않으셨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할머니도 결국 뇌의 일부가 없는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에서 들어왔나?”

내가 유학 후 귀국한지 한참 지나고도 몇번이나 엄마에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치매가 시작 된 것이다.

그 후 할머니의 치매 증세는 급격하게 심해졌다.

이전의 할머니는 대체로 꼿꼿한 모습이었는데, 증세가 발현 된 이후로는 자주 실없이 웃기도 하셨고 자주 통곡을 하기도 하셨다. 그동안은 그 모든 감정을 참아왔지만,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람 처럼.

한번은 젊어서 돌아가신 증조 할아버지 사진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며, 그 분이 어떻게 두 아들과 한날한시에 돌아가셨는지 한참을 이야기 하셨다.
아마도 곱씹으면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하지 않으셨던 이야기였던 것 같았다.
그 날 처음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집을 나가서 길을 헤메기도 하셨다.
삼촌은 고육지책으로 할머니의 손목에 가족의 전화번호를 문신으로 새겼는데, 할머니는 그 문신을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생업이 바빴던 우리 가족들은 긴 회의 끝에, 모두의 집과 가까운 시내 요양병원에 할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가족 모두 틈만 나면 병원을 방문했고, 나도 다니던 학교와도 가까워서 종종 하교길에 들러 할머니를 보고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 동네 일대에서 가장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 요양병원도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곳이라, 때마다 병원 스피커에서 삼종기도를 틀어주었다.
할머니는 그 때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길을 가다가도 삼종기도 때가 되면 잠깐 멈춰서 기도 하던 할머니였다.
그랬던 할머니를 병원에 두고 나오다가 뭔지 모를 서글픔에 복받쳐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 온 적도 많았다.



책에서 소개 된 지미도 성당에서 만큼은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거기서 또 할머니가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한 사람을 규정하는 본질은 뇌에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